조만수(연극평론가)

도시는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거리는 자동차들의 엔진 소리로, 그리고 상가에서는 호객을 위해 증폭된 음악이, 식당에서는 유리벽에 부딪혀 웅웅거리는 온갖 소리로 넘쳐난다. 마치 도시에서는 빛 때문에 눈 부셔 별빛을 볼 수 없듯이, 소리로 가득 찬 도시에서 우리는 ‘소리’ 그 자체에 둔감해 진다.

보이스 씨어터 몸소리는 이처럼 소리의 과잉으로 인해 위축된 우리의 감각을 일깨우는 작업을 하는 집단이다. 소리는 감각되는 것이기에 몸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소리는 하나의 파장으로 우리 몸, 귓 속의 얇은 막을 자극함으로서 인지된다. 그런데 보이스 씨어터 몸소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소리는 몸으로 만들어내는 소리, 그 중에서도 성대를 사용해서 만들어지는 소리이다. 소리의 인지는 귀안의 막의 떨림으로, 그리고 소리의 생산은 목 안 막의 떨림으로 이루어진다. 아니 다만 그 막의 떨림에 국한 되는 것은 아니다. 귀에 닿은 소리의 파장에 온 몸이 반응하며, 몸은 성대의 소리를 증폭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처럼 소리는 몸의 떨림, 울림이다. 그러므로 ‘몸’과 ‘소리’를 하나의 단위로 묶은 ‘몸소리’라는 이들의 집단명은 지극히 정당하다.

<도시소리동굴>은 도시 내에서 마치 ‘동굴’에서처럼 소리를 다른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그 곳에서 소리를 발화하고 듣는 경험하는 것을 기초적인 전제로 한다. 한마디로 이 프로젝트는 도시 안에서 ‘동굴’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도시의 동굴은 단지 소리가 증폭될 수 있는 물리적 여건을 갖춘 공간은 아니다. 도시의 동굴은 ‘동굴’의 원래의 기능을 모두 만족하는 곳이어야 한다. 동굴은 어떤 공간인가?
서울시립미술관의 1층 로비 공간과 미술관 앞마당에서 펼쳐진 이번 작업은 서울시립미술관이라는 공간에 ‘동굴’의 속성을 일깨우는 작업이다. 보이스 씨어터 몸소리가 ‘소리’를 매개로 도시의 한 공간을 다른 공간으로 변모시키는 작업을 한다면, 결과적으로 이들의 작업은 도시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도시 안에서 동굴을 발견하고, 그 동굴이 지닌 잠재적인 의미소들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의 기초적인 목표이다.

동굴은 시원적 공간이다. 그곳이 바로 최초의 인류가 벽에 그림을 그린 곳이다. 미술관은 그러므로 도시의 동굴, 도시 내의 알타미라 동굴이라 할 만한 공간이다. 또한 동굴은 하나의 사원이다. 그곳은 곰과 호랑이가 마늘을 먹으며 인간이 되기를 ‘기도’한 종교적 염원의 장소이며, 암굴 속에서 부처가 깨달음의 미소를 짓는 곳이고, 초기 기독교도들이 숨어 미사를 드렸던 땅굴 같은 공간이다. 그곳은 한낱 텅 빈 공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공간은 변화의 공간이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을 성스러움으로 채우는 공간이다. 사원과도 같은 이 공간에서는 보들레르가 말했듯이 친근한 말들이 새어나와, 온갖 감각들이 ‘상응’하는 공간이다. 이 친근한 말들은 의사소통을 위한 인간들의 분절화된 언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텅 빈 공간을, 보이지는 않지만 감각되는, 그 무엇인가로 채우는 소리이다. 가득 찬 것과 빈 것이 하나이듯이, 사원과 신이 하나이듯이, 텅 빈 공간을 닮은 텅 빈 몸의 소리는 하나이다. 이 소리가 울리는 곳에서는 공간과 몸이 분리되지 않으며, 혹은 울림통과 울림 그 자체가 분리되지 않는다. 파장과 진동이, 그 소리가 담은 의미와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곳에서는 공간과 몸과 소리가 하나를 이룬다.

보이스 씨어터 몸소리의 배우들이 저녁 시간, 모두가 퇴근하고 텅 빈 서울시립미술관 속으로 걸어들어온다. 이들은 신전을 지키는 무녀들과도 같다. 낮 동안의 일상적 공간, 속화된 공간을 그들이 이제 성스런 사원으로 변화시킬 시간이다. 미술관-동굴-사원 속의 예식을 시작하기 위하여 그들은 촛불을 밝힌다.
분절되지 않은 소리, 배우들의 몸통의 울림으로 공간을 채우면 이제 공간 자체가 전율한다. 그리고 듣는 이들의 몸에 다시 그 파동이 닿는다. 소리를 내는 이와 소리를 듣는 이가 하나의 공간 속에서 동일한 떨림으로 소통하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소통은 분절 언어로 이루어진 의사소통과는 전혀 다른 소통이다. 나아가 이 소통은 단순한 감정의 전이도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고 의미화로 환원되지 않는 떨림을 몸으로 공유하는 소통이다. 소리를 내는 이의 몸이, 소리를 듣는 이의 몸에, 그들을 가르는 공간의 거리감을 넘어서. 가닿는 경험인 것이다. 미술관이 전시(exposition)를 위한 공간이라면, 장 뤽 낭시가 말한대로 소리를 듣는 이는 –그들 사이의 거리를 뛰어넘어- 자신의 외부, 자신의 밖에 위치한 타인의 몸, 타인의 살갗에 가닿는 경험을 한다. 장 뤽 낭시는 이를 전시를 뜻하는 exposition과 발음이 같은 신조어 ex(밖)-peau(살갗, 피부)-sition로 표현하였다.1

전체 3부 중 2부는 미술관 앞마당에서 펼쳐진다. 이들은 미술관에서 만들어낸 성스러움의 공간과 대비되는 공간과 소리를 표현한다. 동굴 밖의 공간은 생존을 위한 싸움이 펼쳐지는 들판이다. 이 생존의 싸움에는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여러 사람 중 단 하나의 권력자가 요구되며, 권력자의 자리를 놓고 끊임없는 투쟁이 벌어진다. 왕관을 쓴 이가 다른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위협적으로 포효한다. 그리고 그에 대항하여 다른 이가 고통으로 소리를 지른다. 더 큰 소리를 내는 자가 왕관을 쓰고 나머지 사람은 그가 왕이 되면 고통의 소리를 지른다. 왕의 자리는 계속 뒤바뀐다. 동굴 밖 넓은 공간은 단 하나의 물건, 왕의 의자로 축소된다.

그런데 보이스 씨어터 몸소리가 2부의 공간에서 미술관 밖의 공간을 1부 혹은 3부의 공간을 이루는 ‘동굴’의 공간과 대비되는 공간으로 설정하고 이를 관객에게 드러내는 데에 일정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아직 이 공간을 의미있게 시각화하고 감각화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것은 동굴 밖의 공간이 넓기 때문에 이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배우의 소리로서만 채우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소통의 소리가 아닌, 인위적이고, 불필요하게 증폭되는 소리의 폭력성을 탐구한다면 아마도 2부의 장면은 분명 더 탐구되고 확장될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3부의 공간은 다시 서울시립미술관 로비라는 동굴에서 다시 전개된다. 3부의 공간성을 특징짓는 것은 배우들이 들고 입장한 ‘소도구’이다. 그것은 조명기의 갓처럼 생긴 소도구이다. 그런데 이 소도구는 단지 최초의 그 형태와 관련된 의미소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이 소도구는 잠재적인 의미망들을 전개시키면서 동굴 속의 즐거운 소리 잔치를 풍요롭게 하는 기호로 사용된다. 이 조명기 갓을 위쪽 방향으로 들면, 이 도구는 제사 지내는 제기, 술잔으로 기능한다. 제사를 지내는 무녀들의 등장과 함께 미술관의 공간은 1부에서처럼 다시 성화된 장소로 환기된다. 그런데 이 술잔에 담는 것은 소리, 혹은 소리의 파장이다. 소도구 안에 배우가, 그리고 참여하는 관객들이 자신들의 소리를 담는다. 소리는 이제 보이지 않는 액체가 된다. 그리고 또 다시 이 소도구는 확성기가 된다. 소리라는 액체의 파장이 증폭되고, 제기 속에서 넘쳐나서 공간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이 제기는 조명 갓이라는 원래의 기능에 어울리게 공간을 채워나가는 소리의 파장을 비추는 조명기로 기능한다. 무녀들과 함께 하는 성스러운 제례의 공간은 이제 소도구의 변신이 이끌어가는 놀이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잔을 주고받듯이 관객과 배우는 소도구를 매개로 몸의 울림을 주고받는다. 관객은 소극적인 구경꾼의 자리에서 적극적인 놀이의 참여자로 변화된다. 주고받는 소리들은 겹쳐지고, 섞이면서 노래가 되며, 동굴은 이제 즐거운 놀이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이 즐거운 놀이 속에서 벽면을 조명 갓으로 비추면 그 옛날 동물들의 모습을 그려놓은 곳이 동굴이듯이, 이 곳 미술관의 벽면이 바로 그와 같은 그림들을 걸어두는 곳임을 깨닫게 된다.

결국 보이스 씨어터 몸소리의 도시소리동굴 프로젝트는 미술관을 사원으로, 그리고 놀이터로 만들고, 마침내 미술관이, 혹은 미술이 최초로 만들어지는 그 순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거리예술에 대한 학술행사에서 보이스 씨어터 몸소리는 자신들의 작업이 거리예술에 속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고 하였다. 실제로 이들은 자신들의 작업 속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소리와 몸의 감각을 통한 치유의 효과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보이스 씨어터 몸소리의 <도시소리동굴>은 도시의 공간을 재정의하고, 재감각하게 하는 작업이다. 예술 작품을 향유하는 미술관이 엄숙한 관조의 공간이 아니라, 아름다움이 태동하는 순간과 만나는 환희의 공간임을 이들은 알려주고 있다.

  1. 이를 번역자는 ‘밖갗’이라는 적절한 표현으로 번역해 내었다.